0. 제안과 고민
동아리 회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들었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다. ‘회장’이라는 단어는 내게 너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초등학교 때 몇 번 반장을 맡았던 적은 있었지만 그건 그 때 뿐이었고, 내가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무언가를 대표하는 직책을 맡지 않았었다. 웹 파트장도 내가 웹 프론트엔드를 좋아해서 맡은 거였다고. 회장은 자신감이 넘쳐야하고, 남들을 설득할 줄 알아야하고, 책임을 질 줄 알아야한다. 나에게는 없는 요소들이었다.
그랬기에 사실 이런 제안은 나에게 기회기도 했다. 아마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 회장을 맡으면 더 성숙한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자리가 사람을 바꾼다는 뻔한 말을 한 번 믿어볼까. ‘내가 모든 걸 망쳐버리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하지만 ‘망쳐봤자 얼마나 망치겠나?’ 싶어서, ‘안 해보고 후회하기보다는 까짓거 해 보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한다고 했다. 나름 재밌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실제로 꽤 재미를 느끼기도 했었던 것 같다. 모든 일이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았지만,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된 적은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고민과 고충은 늘 존재했지만,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을 마련할 수 있었음에 감사할 뿐이다.
1. 여기저기 왔다갔다
개학 첫 날 이른 아침, 인쇄소에서 프린트한 부원 모집 포스터를 들고 공학관, 도서관, 기숙사를 들렀다. 이렇게 돌아다니며 포스터까지 붙여야할까 의문이 잠시 들었지만, 할 수 있는건 다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공학관과 도서관은 사무실에 찾아가서 포스터에 도장을 찍고 지정된 위치에 포스터를 부착해야했고, 기숙사는 포스터를 직원분께 제출해야했다. 포스터를 보고 지원한 부원분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디자이너 모집을 시작할 때에는 돈을 더 들여 더 좋은 재질의 포스터를 만들었다. 공대생이라 가볼 일이 없었던 예디대 건물에 들어가 지하1층, 1층, 7층, 8층에 포스터를 부착했다. 공대생은 학교 반대편에 위치한 예디대 건물을 거의 가지 않는다. 건물에 들어서니 마주한 낯선 풍경들은 나를 이리저리 헤메게 만들었다. 이른 아침에 계단을 오르내리며 포스터를 붙였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효과가 크지 않았다. 에브리타임에도 홍보글을 여러번 올렸었지만, 지원자는 많지 않았고 어떻게 디자이너를 모집해야되나 한동안 고민을 하게 되었다.
포스터를 부착하러 학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은 나름 재밌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여러 곳을 돌아다닌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사람들이 포스터를 많이 봐주고 관심을 가졌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후에 나는 거리에 포스터가 붙어있을 때마다 주의깊게 들여다보곤 했다. 정성들여 만들어진 종이 안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지 궁금했다.
2. 알림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회장을 하면서, 언제 가장 힘들었냐는 질문을 들으면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특정한 순간이 있다. 2024년 9월 5일, 학기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파트장들이 지원자들의 서류를 읽고 서류합격자 명단을 나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면접은 3일 간 진행되는데, 2시간 동안 이 분들이 언제 면접을 보면 좋을지 노션에 차근차근 정리했다. 서류합격자분들께 문자를 발송할 때 이 노션 링크를 같이 전달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만약 노션에 적힌 시간에 면접을 볼 수 없다면, 인스타 DM이나 카카오톡채널을 통해 변경 희망 시간을 적어달라고 했다. 당연히 필요한 절차다. 시간이 맞지 않아 면접을 보지 못해 떨어지는 일은 없어야하니까. 하지만 그 문구는 나를 힘들게 했다.
6시 즈음에 문자를 일괄적으로 발송했다. 나는 경영대 K-hub에서 혼자 면접 시간 변경 요청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핸드폰에서 자꾸 진동이 울렸다. 인스타 DM, 카카오톡채널 알림이 핸드폰 상단에 계속 갱신되었다. 정확한 숫자는 기억이 안나지만 25명 넘게 면접 시간 변경을 요청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 변경을 요청했다고? 살짝 놀라긴했지만, 노션을 키고 천천히 면접 시간을 변경해보려 했다.
경우의 수가 나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의 시간을 변경하려고 했지만 그 시간에는 다른 면접자가 이미 면접을 보기로 되있었거나, 다수의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면접을 보기 희망했다. 차근차근 한명씩 면접시간을 바꿔보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어느 순간에는 답이 나오지 않고 막혀버렸다. 25명이 넘는 사람들이 나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고, 내 옆에는 이 상황을 도와줄 사람이 있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급함과 불안함이 나를 덮쳤고, 머릿속은 어느새 새하얘져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 멀리 도망가던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고, 서류합격자분들께 면접 시간 변경에 시간이 조금 걸린다는 답변을 일괄적으로 발송했다. 일단 시간을 번 다음, 한명씩 시간을 확정짓고 천천히 답변을 드렸다. 혼자서는 이 일을 못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른 운영진들한테 도움을 요청했고, 다른 운영진들이 K-hub에 와줘서 시간 변경을 도와줬다. 도와준 덕분에 무사히 면접 시간 변경을 끝마칠 수 있었다.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었지만,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면 정신이 아득했던 경험이 떠올라 괜히 닭살이 돋곤 했다.
3. 변수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무슨 행사를 준비했나 되돌아보았다. OT, 깃 세션, MT, 기획설명회, 팀 매칭, 해커톤, 데모데이… 이 중 기획설명회와 팀 매칭은 내 예측과는 전혀 다르게 상황이 흘러갔다.
개발 부원분들이 스터디를 진행하는 동안 PM과 디자이너는 방학 동안 진행할 프로젝트를 기획하는데, 10주간의 스터디가 끝나가는 학기 말에 비대면으로 PM들이 개발 부원들한테 지금까지의 기획을 발표하는 기획설명회가 진행된다. 저번 기수는 ms teams로 진행했었는데, 이번에는 유튜브 라이브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했는데. 맨 처음 간 스터디카페에서 라이브가 너무 렉이 걸려서 다른 스터디카페로 급하게 위치를 옮겼다. 하지만 렉은 줄어들지 않았고, 라이브를 중단하고 PM분들의 발표영상 링크를 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진행된 팀 매칭. 팀 간 밸런스를 어떻게 조정해야할까 고민하다 파트별로 잘하는 사람들을 헤드 부원으로 지정해 한 팀당 헤드 부원 한 명씩만 들어갈 수 있게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부원분들이 이 제도가 좋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급하게 설문조사를 진행해 여론을 확인하고, 헤드 부원을 없애고 다시 팀 매칭을 진행했다. 그리고 팀 매칭이 무사히 진행되었으면 좋았겠지만, 갑작스러운 부원분들의 탈주 통보와 팀 내에서의 갈등의 표출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나가려는 사람을 붙잡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이 부분에서 나는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이 때 내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변수가 자꾸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그냥 다 그러려니 하고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4. 회장은 J가 맡는게 맞는 것 같습니다
오프라인으로 진행되는 행사는 준비할 게 많았다. 해야할 일들과 준비할 물품들의 리스트를 적어두고 체크를 하지 않으면 까먹어서 나중에 고생을 하게 된다. 무언가를 적어두고 계획하는 행위가 사실 내게는 조금 어색했다. 그렇게 계획적인 사람은 아니었던지라(mbti P). 가장 열심히 준비했던 행사들은 방학에 진행되었다. 해커톤과 데모데이. 해커톤은 학교로부터 지원을 받았는데, 직원분께 받은 카드를 가지고 식당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결제를 하고 영수증을 폰으로 촬영했던 기억이 난다. PPT를 미리 제작하고, 해커톤이 진행될 장소를 미리 갔다왔다. 운영진 친구가 디자인해준 판넬과 현수막을 주문하고 픽업했다. 고려해야할 점이 많았지만 다른 운영진분들이 도와준 덕분에 무사히 해커톤을 끝마칠 수 있었다. 해커톤은 밤을 새야해서 잠이 많은 내가 잘 진행할 수 있을지 조금 불안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젊으니까. 그럭저럭 잘 버틸 수 있었다.
데모데이는 주문해야할 것들이 많았다. 스티커, 포스트잇, X배너, 팜플렛.
스티커는 외주를 맡겼는데, 사실 지금까지 외주를 맡겨본 경험이 없어 조금 긴장을 했지만 다행히도 좋은 디자이너분과 매칭이 되어서 좋은 퀄리티의 디자인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맨 처음 컨택한 디자이너분은 연락이 안되어서 고객센터에 연락해 환불을 받긴했다). X배너는 저번 기수 때 썼던 지지대를 활용했고, 팜플렛은 데모데이 전까지 배송이 올까 불안했는데 무사히 그 전에 와서 다행이었다. 준비를 하면서 가장 걱정이 많이 되었던 행사였지만, 무사히 끝낼 수 있어서 속이 후련했다.
5. 익숙해 질 때쯤 찾아온 끝
돌이켜보면 크게 난이도를 요구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사람들 앞에 서서 사회를 보는 일은 처음에는 무척 떨렸지만 하다보니 익숙해졌고, 행사를 계획하고, 관계자분들과 연락을하고, 부원들에게 공지를 하는것은 넉넉하게 시간을 투자하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시간, 회장을 맡으며 가장 많이 투자한 자원은 바로 시간이었다. 업무가 익숙해지만 일을 처리하는 데 더 적은 시간이 들었지만, 가끔씩 내가 해야되는 다른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동아리 업무를 해야할 때에는 시간이 아깝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 원래 하던 일을 못할 때에는 더 더욱. 사실 내게 돌아올 무언가를 기대하고 회장을 맡으면 후회할 가능성이 크다. 회장이라는 경험을 해본다는 것이 내게 돌아온 가장 큰 성과였다.
많은 사람들, 특히 운영진들과 많이 교류했다. 의견 충돌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큰 갈등 없이 같이 동아리를 운영할 수 있었다. 운영진을 맡은 친구들은, 목표를 가지고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활발한 갓생러들이었다. 그 친구들을 보면서 많은 동기부여가 되었고, 나도 자극을 받아 주어진 일에 더 열심히 몰입하게 되었다. 회장을 맡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았을 때, 가장 크게 바뀐 것은 마음가짐인 것 같다. 생각보다 많은 일을 겪어서 이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더라도 당황을 훨씬 덜 하게 되었다. 처리해야 될 일이 있으면 노션을 키고 리스트를 작성하게 되었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동시에 여러개가 생기더라도 우선순위를 정해 차근차근 정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쉬웠던 점은 늘 있었지만 최선을 다한 거 같아 후회는 없다. 사실 이런 경험을 언제 해보겠나 싶어서 재밌게 업무에 임했던 것 같다. 이제 내가 회장을 맡았던 KUIT 4기가 끝나고, 곧 KUIT 5기 부원 모집이 시작된다. 새로 회장을 맡은 친구가 나보다 일을 똑부러지게 잘해서 더 탄탄한, 완성도 있는 동아리가 될 것 같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사실 다음 기수까지 동아리를 이어가지 못하고 망해버리면 어쩌나 걱정을 좀 했었으니까.
KUIT 4기를 같이해준 운영진들, 튜터, 그리고 부원분들에게 같이 활동해서 재밌었고, 또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회장이 조금 띨띨해서 걱정 많이들 했을텐데 무사히 끝나서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지 않을까싶다. 계속 이메일과 카톡을 주고받으며 동아리를 지원해주신 학교 직원분께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위에서 많이 떠들어댔지만 사실 나 혼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들 열정적으로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完. Season 25의 완결, Season 26의 시작
종이 울리고 새해를 맞았을 때,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었다. 아직 회장이 다 끝나지 않았었으니까. 2월 21일 데모데이가 끝나고 나는 비로소 25살을 끝마칠 수 있었다. 동아리 회장의 끝, 4학년 1학기의 끝, 25살의 끝. 정신없이 바빴던 25시즌이 끝나고 새로운 26시즌이 이제 시작된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몰아닥칠 것 같은 기분. 불안함과 기대가 섞여 오묘한 느낌이 몸을 감쌌다. 어떤 상황이 오든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에 작성하게 될 후기에도 쓰고 싶은 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힘들었지만 많은 점을 배운, 기억에 남는 경험들이 쌓였으면 좋겠다.
'KU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kuit_onboarding] 풀페이지 스크롤 애니메이션 구현하기(Framer-motion) (1) | 2024.08.23 |
---|---|
[kuit_onboarding] Next.js 프로젝트에 strapi로 데이터를 쉽게 추가해보자 (0) | 2024.08.16 |
[KUIT] 2024-1 웹 파트장 후기 (29) | 2024.06.06 |
[KUIT] 10주차 보충 - 토큰 저장 위치, 세션 인증 방식과 JWT, .env 파일 (0) | 2024.06.06 |
[KUIT] 9주차 워크북 보충 - API endpoint, Axios와 Fetch의 차이, GraphQL (0) | 2024.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