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의 뒷면이 작살났다. 언젠가부터 생겼던 작은 금은 어느새 커져 가지를 뻗어나갔다. 이 흔적들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별 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뒷면이 벗겨져 보여서는 안될 부품이 보였고, 케이스를 열면 유리조각이 떨어져나왔다. 험하게 다루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순진하게도 나는 투명케이스가 외부로부터 오는 모든 충격으로부터 폰을 지켜주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아무리 약해보이는 충격이라도 그 대상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종종 까먹는다.
스마트폰 교체의 적절한 주기는 얼마나 될까. 사람마다 다양한 답이 나오겠지만 그 답변들 중 틀린 답변은 없을 것이다. (컴퓨터공학부에 다니지만) 전자기기에 무지해서 답변을 하기 쉽진 않지만, 기기 뒷면에서 유리조각이 떨어지면 폰을 바꿀 때가 된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운이 좋게도 인턴을 하면서 첫 월급이 나왔다. 어느 정도 고민을 하다 3개월 할부로 새로운 아이폰을 구매했다. 너무 큰 소비를 한 것인가 하는 불안감과 새로운 폰을 사용하게 된다는 기대감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그런 와중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 같이 지내왔던 스마트폰과 헤어질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 아쉽다거나 그런건 아닌데,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이 체감이 되었다.
1. 기대와는 달랐던 20대 초반, 나는 폰을 들여다봤다
재수가 끝난 2019년 12월, 부모님과 함께 휴대폰 대리점에 찾아가 아이폰11을 구매했던 순간으로부터 어느덧 5년이 흘렀다. 나의 첫 스마트폰이자 20대의 초반을 함께한 친구, 이 친구와의 첫만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가 찾아왔고, 상경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람을 피한 채 좌절하던 그 우울했던 순간들을 아이폰을 쓰며 견딜 수 있었다. 자취방까지 구했지만 서울로 올라갈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친구를 만나고도 싶었지만 전염병을 맞닥뜨리기 싫어 약속을 잡지도 않았다. 닭장같은 학원에 갇혀 캠퍼스 라이프를 꿈꾸며 하루하루 버틴 결과가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점. 이 괴리감이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아 답답했다. 그래서 KF94 마스크를 끼고, 카카오바이크로 천변을 가로질렀다. 사운드클라우드에 들어가 지브리 스튜디오 음악 로파이 버전을 반복 재생했다. 페달을 밟으며 바람을 맞다보면 먹구름이 낀 것 같던 감정에서 잠시 해방될 수 있었다.
아이폰이 있어 심심한 적은 없었다.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보고, 롤토체스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사회적 거리두기도 어느덧 익숙해지고 폰으로 즐길 컨텐츠는 언제나 넘쳐났다. 새벽 4시까지 폰을 하다 점심 즈음에 깨어나 늦은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2020년은 지나갔고, 2학년이 되어도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고 비대면 수업을 듣다 나는 입대를 했다. 캠퍼스보다 훈련소를 먼저 갈 줄은 전혀 몰랐었는데. 조금 허탈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머리가 빡빡 깎인 채 들어간 논산훈련소에서는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하루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살다가 갑작스럽게 폰을 뺏기니 좀 많이 심심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한다고 10일 동안 야외훈련도 못하고 앉아있어야 했으니 시간은 정말로 느리게 흘렀다. 핸드폰을 키고 유튜브를 하고 싶었다. 훈련소 밖에 사람들은 폰으로 도쿄올림픽을 보고 있었을텐데. 인편으로 올림픽 소식을 확인할 수 있긴 하였지만, 나는 휴대폰을 하고 싶었다. 훈련소 어딘가에서 전원이 꺼진채 잠들고 있던 아이폰11이 그리웠다.
논산훈련소에서 3주가 지나고 경찰학교로 가게 되었다. 경찰학교에서는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그리고 일과가 끝난 후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었다. ‘여기 복지 미쳤는데?’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폰을 받고 나서는 롤토체스를 하고, 와일드 리프트를 하고, 넷플릭스를 보고, 유튜브를 보느라 너무나도 바빴다. 논산훈련소와는 다르게 여기서는 다들 휴식시간에 폰을 하느라 바쁘다보니 살짝 덜 친해진 느낌은 있었다. 그래도 뭐 어때. 휴대폰도 하고, 훈련도 열심히 받고. 3주는 훌쩍 흘러 나는 서울에 있는 기동대로 가게 되었다. 자대에 배치되고 난 뒤부터는 게임을 덜하게 되었다. 그 대신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가끔은 밀리의 서재로 책을 읽었다. 18개월의 군 생활동안 아이폰 덕분에 덜 심심했다. 휴대폰 사용이 허락되지 않던 옛날 군 생활은 많이 끔찍했을 거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놀 거리가 없어 심심한 선임들이 얼마나 후임들을 괴롭혔을지, 그 일을 겪지 않아도 되서 감사할 따름이다.
2. 쇼츠, 릴스, brainrot
중학생 시절, 유튜브 알고리즘에 우연히 대도서관의 마인크래프트 플레이 영상을 보고 그에게 푹 빠진 적이 있었다. 영상 하나에 30분 정도로 꽤 길었는데, (지금이라면 절대 안 그러겠지만) 배속도 하지 않은 채 집중해서 영상을 감상했었다. 그렇게 긴 영상들을 재밌게 보고는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짧은 영상들을 보다보니 그 포맷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5초 정도보고 재미가 없겠다 싶으면 바로 넘겨버리면 되니 너무나도 간편했다. 숏폼에서는 나의 참을성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길어도 1분 안에 기승전결이 훅훅 진행되고 도중에 댓글을 보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해도 되니 정말 편리한 방식이었다.
영상 길이는 짧아졌지만, 폰을 붙잡고 있는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시간이 뜰 때마다 폰을 키고 멍하니 짧은 영상들을 보았다. 그 순간 동안 나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일까. 내 뇌는 도파민에 절여지게 되었고, 내가 좋아하던 정적인 순간들이 어색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잠을 잘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계속 스크롤을 하느라 자는 타이밍을 놓치게 되었다. 외국에서 ‘brainrot’라는 신조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뇌가 썩는다는 뜻인데, 짧은 영상들을 계속 보다보니 참을성이 없어지고 단순한 자극만을 찾게되는 현상을 풍자한 단어이다. 그리고 나는 그 단어에 딱 부합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멍청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폰을 멀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쇼츠나 릴스를 안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아깝다는 자각을 전보다는 많이 하게 되었다. 결국 무엇이든 중독이 되면 그 결과는 안 좋으니까. 지금까지 내가 폰으로 무엇을 많이 했는지 되돌아봤을 때 떠오르는게 릴스를 보는 거였다는 사실이 살짝 부끄럽다. 글을 쓰면서 되돌아보니 더더욱 반성을 하게 된다.
3. 폰을 바꾸었다는 것이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을까
다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일상 속에서 이전과 다른 점이 있는지 살펴보고, 만약 찾게되면 그걸 핑계로 나와의 약속을 새롭게 만든다.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었으니 더 많이 다정해져야겠다, 오늘 단 걸 많이 먹었으니 앞으로 운동을 많이 해야겠다, 옷을 새로 샀으니 더 깔끔하게 입고 다녀야겠다 등등… 그리고 나는 5년 동안 같이했던 폰을 바꾸게 된다. 이거야말로 정말 큰 다짐의 기회가 아닐까싶었다. 과연 무엇을 다짐해야할까?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오랜만에 글을 써보기로 했다. 인턴을 한다는 핑계로 한동안 아무것도 적지 않았으니까.
대학생으로서 마지막 학기를 보낸다는 사실에 대한 아쉬움, 3월부터 시작한 인턴 생활에 대한 적응, 조금씩이나마 해야되는 취업 준비, 새로운 인간관계에 대한 반가움과 예상치 못한 사건들,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감정을 꽤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계속 글을 적고 있으니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옛날에는 메모장을 키고 무언가를 계속 적곤했었는데. 귀찮아서 그냥 생각만 하고 말다보니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고 나도 조금씩 충격을 떠안고 있었나보다. 마치 금이 간 내 아이폰처럼.
새롭게 폰을 바꾸면, 예전처럼 무언가를 계속 적어보는건 어떨까. 적게 되는 내용이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는 판단하지말고. 생산적이기 위한 글쓰기는 물론 필요하지만 요즘따라 그거에 너무 얽매였던 거 같아서. 그냥 가볍게, 이 정도의 다짐만 해볼까한다. 부담스러운 다짐은 어차피 못 이뤄낸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니까.
유리조각이 나오는, 망가진 폰은 어떻게 처분해야할까. 아마 보상판매를 시도해도 한 푼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마 계속 집에 보관하지 않을까싶다. 시간이 지나 집을 청소하다 우연히 이 폰을 보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들까 궁금하다. 금이 간 자국을 바라보며 그 때 참 폰을 험하게 다뤘었지라고 웃어 넘기지 않을까. 새로 사용하게 될 핸드폰은 금이 가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나도, 그 핸드폰도 충격에 깨지지 않고 단단하게 버텼으면 좋겠다. 단단히 버텨서 시간이 지나도 유리조각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으면, 언젠가 다가올 엔딩이 온전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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